이 글은 글쓰는 개발자 모임, 글또 10기를 지원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기도 하며, 제가 한번쯤은 적고 싶었던 제 일대기에 관한 글입니다
1992.05 ~ 2024.09(now)
1~7살[탄생~유치원](1992~1998)
Hello World! But...
나는 이 세상에 37주 미만에 태어난 미숙아임과 동시에 2.2kg인 저출생체중아로 태어났다
인큐베이터에 꽤 오랜 시간을 있었다고 한다...ㅠ
약하게 태어난 탓일까...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나는 3살 초까지 먹는것들 대부분을 게워내기 일쑤였고, 말하는 것도 늦었다고 했다
이러나저러나 애기였던 나는 그래도 태어난 김에 살고싶었나보다..ㅎ 그래도 조금씩은 건강을 회복해 나아갔다
하지만 태어날 때 미숙아여서 그런진 몰라도 위 사진에 첨부한 안 좋은 특성중에 몇개가 있는 것 같다..ㅠ
그리고 내가 태어난 상도동에서 2살이 조금 지난 시점, 영등포로 이사를 갔다
영등포에서 연년생 동생인 여동생도 세상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5살이 되던 해에 유치원을 다니게 됐다
아마... 내 기억으로 여자친구는 없었던거같은데 나한테 플러팅을 하는 여자애는 있었던것같다(90년대 당시 플러팅이란 용어는 없었다)
그리고 이 유치원에서 내 책임감을 볼 수 있는 사건이 생기는데..(유치원에서 어떤..?)
나는 감기가 걸려서 몸살기운이 있고, 어지러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빠지면 나랑 같이 여러 율동이나 연지곤지 춤 등을 준비했던 친구들이 짝궁이 사라지기때문에 내가 빠질 수 없었다고 한다
얼굴이 허옇게 뜬 채로 아픔을 참아가며 식은땀을 흘리면서 억지웃음을 지어보이며 훌라후프를 돌리는 내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걱정이 엄청 컸지만 한편으론 대견하다고 하셨다
8~13살[초등학교](1999~2004)
초1. 미숙아로 태어나서 유치원을 꾸역꾸역 다녀서 졸업한 뒤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저학년때부터 맨날 시험보는 받아쓰기에서 나는 거의 항상 100점을 맞았었다
조금은 가난했던 가정에서 영어유치원을 보내준 것도 아니고, 국어 과외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언어를 듣고 쓰는게 편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에 컴퓨터가 1대 생겼다
지금은 볼 수 없는 CRT모니터를 갖고 있는 Windows 98 컴퓨터였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이 당시 레인맨이었나 타잔이었나 컴퓨터에 깔려있어서 한때 재밌게 했던 기억이 있다
초2때는 그 당시 덩치가 큰 한 친구가 나를 맨날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나는 왜 때리냐고 말했지만... 그 친구는 그냥 때렸다
뭔가 맞기 싫어서 엄마아빠한테 내가 맞는다는 사실은 말 안하고 태권도를 끊어달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는 정말 학교가 가기 싫었었는데 동네 친구들이랑 하교하고 축구하는게 재미있어서 어지저찌 견뎠나보다
초3. 집에서 버디버디를 하면서 소리바다로 노래를 다운받아서 윈앰프로 틀곤 했다(이땐 누구나....)
그리고 메가맨X4, 포켓몬 골드버전, 파랜드택틱스... 같은 게임을 했다
아마 그리고 이때쯤 디아블로2와 스타크래프트를 시작했던 것 같다!!
초4~초6. 서울 영등포를 떠나 경기도 안양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모든게 낯설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했던 그 처음부터
같이 하교하면 축구했던 동네 친구들도 없었다. 나에겐 이 외로움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공부, 농구, 컴퓨터였다. 공부는 내가 어릴때부터 꾸준히 해왔던거라 100점만점 평균 94점 정도를 받았다. 동네 종합학원을 끊었다
4학년 2학기에는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반장을 맡았었다. 그냥 딱히 크게 하는건 없고 떠든 사람 적기, 당번 뽑기 이런거였다ㅋㅋ
그리고 이제 같이 공을 패스해줄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아파트 단지에서 공 하나만 있어도 혼자 놀 수 있는 농구가 내 취미가 됐다
마지막으로 뭔가 컴퓨터에 대해 배우고 싶어졌다. 이유는 없었다. 큰 목적도 없었다
(보통 개발자들이 컴퓨터에 공부하는 첫 목적이 혼자서 게임 만들어보기<라는 보통의 것이었다면 나는 그런건 딱히 없었다)
지금은 아마 컴퓨터학원들이 블럭코딩이니.. C언어니 파이썬이니 하겠지만 2000년대 초는 그런거 없었다. cmd 아니면 visual basic..
나는 컴퓨터 언어보다는 컴퓨터 학원에 있는 교재들 + 자격증 위주로 학원을 다녔었다
자격증은 요즘 무슨 문제은행식이 아니라 1쪽부터 끝쪽까지 제대로 하나하나 배우는 방식으로 가르쳐 주셨었다
그리고 이 당시 컴퓨터선생님이 3분(원장선생님+오래된컴퓨터쌤+그냥직원쌤)이 계셨었는데, 1세대 원장선생님이 오래근무한 컴퓨터선생님한테 원장을 맡아보는게 어떻냐고 하는.. 그런 세대교체의 시기(?) 였던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오래된 원장선생님은 그 당시 visual basic을 조금 하셨었다. 나도 그 당시에 어깨너머로 원장선생님이 하는것을 구경하고 질문도 해서 조금은 배웠던 기억이 있다(아마 변수, 반복문, 조건문 정도였던 것 같다.. 기억이 잘 안난다!!)
그리고 학원에 있던 책들을 공부했다. 아마 지금 나이가 지긋하신분들이라면 들어봤을 것 같다. Namo Web Editor4, Photoshop7, 페인트샵 프로, 플래시 이런것들을 공부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OA라고 불리는 한글,엑셀,파워포인트 3대장에 더불어서 엑세스,인터넷 이런것도 공부했었다
그래서 취득했던 자격증들을 나열해보면
2002년 초4때 워드프로세서 3급, 2급, 1급
2003년 초5때 정보처리기능사, 2004년인 초6때는 ITQ 한글/엑셀/파워포인트/인터넷
을 취득했다
지금은 워드프로세서의 위상이 땅으로 떨어기도 했고 2012년에 워드프로세서 3급과 2급이 폐지됐다고 한다
뭐 난 22년도 전에 딴거라 아쉽진 않다.. 그 당시 CPU/Memory, KB/MB/GB 이런걸 배우기만 해도 재밌었고 시험장에 가면 내가 제일 어렸고 내가 제일 빨리 풀고 나왔었던 기억이 있다ㅎㅎ
초등학교 6학년때는 또 한번 반장을 맡게 됐고, 이때 여름방학에는 기억나는 사건이 있다
담임선생님이 여름방학 숙제를 뭐 국영수사과 문제 풀기 이런거를 풀어오라고 내줬었는데, 공부해오기 싫으면 전 세계 나라 이름들을 외워오라고 시켰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방학숙제를 검사하는 시점에 전 세계 나라이름을 외워온 사람은 나랑 부반장 두명 뿐이었다
내가 그 당시 얼마나 달달 외웠었냐면, 깜지를 엄청 쓰고 깜지를 쓴 거를 밥먹으면서도 보고 화장실에 가서도 봤다
아프리카부터 시작해서 아시아 유럽 등등..
가나 가봉 감비아 기니 기니비사우 나미비아 나이지리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한민국 그루지야 네팔 라오스 레바논 방글라데시...
나중에는 노트에 가/감/기/기/나/나/남.. 이런식으로 앞글자만 적어서 달달 외웠던 기억이 있다
내가 랩처럼 속사포로 모든 나라 이름을 외우니까 그때 반 친구들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하다..쿠쿠
나 이외에 부반장도 외워왔었는데 빠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반장/부반장한테 따로 시킨것도 아닌데 둘만 나라이름을 외워온게 넘 신기했다
초6때 맡은 반장직은 꽤 열심히 활동했다. 담심선생님의 UCC 제작에도 참여하고 방과후 활동, 조금 학습이 뒤떨어지는 친구 도와주기..등
14~16살[중학교](2005~2007)
중학교는 무려 김종국이 나온 안양의 신성중학교로 입학했다(나중에 알게된 사실..)
일단 자격증은 위 사진처럼 중1. 2학기쯤 ITQ 액세스를 취득했다
이 당시 기억나는건 내가 한타/영타를 엄청 빠르게 쳐서 900타정도 나왔던 것 같다
14살 2학기쯤이었나 15살쯤이었나 하얀 말티즈를 어머니가 데려왔다
이름은 몽이라고 지어줬고, 집에 올 당시에는 3?4?개월 아기 강아지였다
얘가 겁이 많아서 아침에는 쇼파 밑에 들어갔다가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 나와서 밥을 먹고 다시 쇼파 밑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와서 우리 가족과 함께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2 무렵 또 하나의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었다
내가 IT 꿈나무로 뽑혀서 여름방학때 우리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옆에 있는 여중으로 친구1명과 선배(중3) 한명과 함께 무언가를 배우러 간 것이다. 그것은 C언어였다(2024년 지금만큼 코딩이 활발하지 않았고, 그 당시 시작은 무조건 C였다)
와~! 무슨 printf, scanf같은 외계어를 입력하라고 하고 &를 입력하라면서 뭘 알려주는데.. 정말 너무 재미가 없는거다
그리고 가장 싫었던 점은 여름방학(!!!!!)때 기존의 학교에서 보충수업을 끝마치면 옆에 여중으로 도시락을 싸서 수업을 배우며 개인이 싸온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8시 반까지 신성중학교로 가서 12시까지 수업받고, 옆에 여중으로 1시까지 이동해서 7시까지 수업받기..)
난 이 당시 농구만 사랑했던 것 같다... 학교수업때 필통 안에 MP3에 농구 하이라이트 영상을 담아서 마이클조던과 스카티 피펜, 코비브라이언트 영상만 주구장창 보다가 쉬는시간과 점심 시간만 되면 나가서 농구를 하고 오는 그런 애였다
검은 콘솔창에 뭘 입력하라니... 우.. 차라리 지금처럼 Python turtle로 사각형, 육각형 그리기 또는 스크래치로 블럭코딩하기 이런거라도 있었으면 정말 재밌었을 것 같다
말이 길었지만... 결국 포인터를 배우기도 전에 나와 동갑 친구, 그리고 한 학년 선배 총 3명은 중도 하차를 선택하게 되었다
-> 20살에 다시 C언어를 만나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ㅠ 이때 미리 공부할껄..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쫌만 참고 잘 배웠으면 중학교/고등학교때 프로그램을 몇십개나 만들줄 아는 이름있는 개발자가 될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이 조금 있긴하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것보다 농구를 좋아하는 질풍노도의 15살한테 여름방학에 1시부터 7시까지 밥도 안주고 도시락 챙겨오라 하면서 공부를 시켰었기 때문에 과거로 돌아간다하더라도 뭔가 튀었을 것 같다)
중3으로 올라가면서 큰 고민을 하게 되는데 정보고(특성화고등학교)로 진학을 할지 인문계고로 진학을 할지 정해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뭘 선택했을까..? 그건 다음 단락으로..ㅋ
농구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때 학원에서 배운 플래시 수업으로 농구하는 친구들을 플래시로 만들었었다(지금은 지원이 끊긴...)
그리고 글쓰기에도 아주 조금의 소질이 있었던 것 같다(웃음)
17~19살[고등학교](2008~2010)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 진학을 위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택했다
아마 나와같은 결정을 내린 친구들이 많을 것 같다.. 2000~201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교네임벨류가 무진장 쎘다(내 기억상으론..?)
고등학교때는 사실 별로 쓸게 없다..
NBA 선수인 데릭로즈와 코비브라이언트 영상을 보고 쉬는 시간, 점심시간, 야자 시작 전에 농구만 주구장창 했던 기억이..ㅜ
주말에도 동네친구와 농구장을 가서 3~4시간씩 어른들하고 농구하고 그랬다
나는 참고로 가드였다!! 빠른 돌파와 패스. 그리고 종종 슛을 넣는 Point Guard
농구 대회도 나갔었다(결과는 안좋았지만..!!)
시합을 나갔었던 날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분위기를 잡으며)
그리고 다시 공부얘기를 하면... 이과로 전향해서 수1, 수2와 쌈박질을 했다(결국 내가 졌지만...ㅠ)
아래는 농구카페A가 무슨 사건으로 운영을 멈추게 되어 농구카페B에서 글을 쓰고 댓글을 달았던 모습
아! 그리고 초-중-고 모두 생활기록부에 꿈을 적으라고 할때마다 항상 프로그래머였다
20~25[대학생~반오십](2011~2016)
수능-대학교
수능에....굴복해버렸다!!!
2010년 수능은 역대급 불수능(어려웠다는 뜻)
집안사정으로 재수는 어려웠었다..ㅠㅠ 정말 내년에 치면 잘할 수 있었는데......휴ㅠㅠㅠㅠㅠㅠㅠ
고3때 인서울 중간정도 갈 수 있는 점수였는데 수능때 긴장을 해서인지 거의 전등급 2~3등급이 떨어져버려서 지방의 모 대학으로 진학하기로 결정을 내렸었다
과는 당연히 컴퓨터공학과였다
인생 첫 알바 - 새벽 12시간 물류센터
잠깐 수능이 끝난 직후 이야기를 하면, 수능이 끝나고 난 몇일 뒤 동네 친구 2명이 나한테 알바할 생각 없냐?라고 물어봤다
나는 고민하다가 오케이! 라고 외쳤다
그래서 19살 인생 첫 알바를 시작하게 됐는데... 저녁7시에 가서 아침7시까지 일하고 돌아오는 물류센터 알바였다
지금은 쿠팡허브, 쿠팡물류센터 이런게 있지만, 2010년 당시에는 없었던걸로 기억한다
첫 알바는 혹독했다.. 거의 남자들밖에 없었고, 그쪽 직원들의 욕설은 기본이요. 야식은 라면이었는데 정수기에서 뜨거운물이 안나와서 찬물로 부어서 라면스프를 풀어서 먹었다(진심이다ㅋㅋ)
물건을 어깨로 짊어지고 상차를 기다리는 트럭 앞에다 옮기는 작업이었다. 힘이 약하거나 거의 없는 여자들은 그 상차 트럭앞에서 어떤 이동형 캐비냇?? 같이 생긴거에 상자를 쌓아 올리는 역할을 맡았다
정말 하얗게 불태웠다.... 그리고 받은 알바비는 4만원 남짓. 집에 와서 나랑 내 친구들은 남의 돈 벌기가 이렇게 힘들구나 하며 뻗었다ㅋㅋ
대학교 & 알바
이듬해인 2011년, 대학교는 통학이 아닌 기숙사에서 지내며 1학년을 어찌저찌 보냈다
하지만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던 응어리가 날 괴롭혔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반수or편입을 결심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반수는 힘들것으로 판단하고 장기간을 준비해서 가는 학사편입으로 어느정도 생각을 했다
20살부터 개인사정 등으로 용돈을 안 받기 시작해서 학교를 다니면서 동시에 근처에서 알바를 구해야 했다
그래서 구한 알바는 파스타집 알바였다! 닐리파스타! 샐러드를 곱게 올리고, 파스타 면을 젓가락을 이용해서 먹기 이쁘게 정리하고 내놓고 설거지하는게 주 업무였다
또 하나 TMI를 말하자면 2010년에 카카오톡이 출시되서 다들 카카오톡을 사용할때, 나는 고등학교때 구매한 연아햅틱을 사용하며 문자로만 친구들이랑 소통했기때문에 과 내에서 활발히 놀지 못했다. 술도 싫어하고... OT랑 MT도 자발적으로 거절했었다(반수나 편입을 마음에 두고있기도 했었기때문에)
군대
2012년에는 거의 정해진 남자들 인생 타임라인. 대학교2학년? 군대가야지!!였다
님들..... 훈련소 2번 가보셨나요..?
나는 2012년 5월 군번으로 논산훈련소에 입대했었다(현역/1급) 그러나.....
어릴때 병약하게 태어나서 그런가? 땡볕에서 훈련을 받다가 어지러워서 쓰러졌는데 눈을 떠보니 의무대였다(조교나 간부의 혹사 아님)
그리고 그 당시 혈압이 170이 넘었었다. 그런 나를 보고 그 당시 소대장님은 내가 계속 훈련받기 어렵다 판단하셨는지 사회로 복귀해서 몸 검사 더 받고, 혈압에 대한 치료를 받고 오라고 하시며 나를 민간인(?)으로 만드셨다.
이때가 내가 훈련받은지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오바로크 치고, 제식 배우고, 훈련소 동기들하고 친해지고 있었는데..ㅠ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니 벙찐 표정으로 너가 왜 거기서나와..?라는 표정을 짓고 계셨다
하하..ㅠ 부모님께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일단 알겠다고 하고, 하루정도 쉰 다음 병원을 순회하며 이것저것 검사를 해봤다
근데 결론적으로 나는 공익의 몸이 아닌 현역이었다ㅋ큐ㅠㅠㅠㅠ
휴......그래서 다시 훈련소를 가게 되었는데 그것은 5개월 뒤인 10월이었다!
2012년 5월 군번이 10월 군번이 되는순간..ㅠㅠㅠㅠㅠㅠㅠㅠㅠ
친구들은 2,3월에 간 군대를 난 5월에도 늦게 간 거였는데 10월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다시 가게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점이 있었다! 5월에 갔을때는 일반 소총병. 땅개로 갔었고, 이번 10월에는 관련 자격증 서류들을 준비해서 특기병으로 가게 되었다
1달의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내가 받은 부대는 창원의 모 사단이었다
(나 집 안양이라고.....!! KTX 타면 얼마여;;)
내가 부대로 가서 배치받은 특기병 명칭은 기계병이었다. 기계병?? 뭐하는거임?
2012~2014년 당시 해당 사단이 아날로그 전화기에서 IP 전화기로 이전하고 있었는데, 이 IP전화기를 통신대대 차원에서 불출하고 서버실과 전화망을 관리하고 라우팅 등을 해주는 역할이었다
아마 2014년 이후의 후방부대에서 전화기 뒤에 LAN 케이블을 꼽는다면 그건 내 작업이 좀 들어갔을 것이다--v
어쨌든 꽤 의미있는 일을 맡았다. 내가 근무하는 서버실은 바깥쪽에서 컴퓨터가 있고, 안쪽에는 랙에 장비들이 암호화기 등을 거쳐서 셋팅되어 있었다. 이 초기 셋팅은 통신사 3사중의 한곳에서 우리 부대랑 합작해서 만든 것으로 알고있다
맨 처음 전산실에 들어가 공부한 것은 LAN 케이블 만드는 순서였다
흰주주흰초파흰파초흰갈갈<이렇게 외웠다.. 이게 뭐냐면 UTP선, RJ-45 헤더잭 내부에 들어가는 랜케이블 순서이다
그리고 곧 전역할 선임의 인수인계 문서도 받았었다. 이 당시 슈퍼 에이스이던 선임이 대부분 셋업을 해놓고 가서 내가 크게 건드릴건 없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 앙드레 말로
내가 좋아하는 문구를 스프링 공책 맨 앞에 적었다
프로그래밍 관련이 아닌 내가 적은 현실 트러블슈팅 노트였다!! 지금와서 다시보니 뭔가 의미가 깊군...!!
이 당시 부족한 지식을 채우기 위해 후니의 시스코 네트워킹 관련한 카페인 네이버카페도 가입했다
아! 그리고 요즘 군대에서는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도록 마련해주고, 군적금도 들어준다고 하는데...ㅎㅎ
내가 근무할 당시에는 연등(밤 10시 넘어서 11시나 12시까지 컴퓨터or독서할 수 있는 시간)시간에 컴퓨터를 하는 것은 상병 이상만 가능한 것이었고, 컴퓨터를 한다고 해도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나 주고받고 있지 코딩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한 목표는 전역 때까지 책 100권을 읽어보자!!!! 였다
진짜 주구장창 읽었다... 아마 동기들도 내가 책을 많이 읽는 줄은 알았어도 100권까지 읽는줄은 몰랐을껄?ㅋㅋ
더 많지만 여기까지 하고 마지막에 또 적은 문구를 오픈해본다
이등병때 아침에 TV에 뮤직뱅크나 뮤직비디오가 나오도록 틀고 작지도 크지도 않은 볼륨을 맞춰놓고 커튼 치고, 병장들 떼굴떼굴 굴러가면 침낭 개어주고, 환복하고 나가서 구보하고... 일과하고 훈련받고 저녁에는 책읽고.. 정말 힘든 생활을 보냈다
상병쯤 지나서야 숨통이 트였던 기억이 난다
책을 100권쯤 읽으니 느낀 점은 자기계발 서적은 어느정도 같은 말을 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각각 책마다 다른 성격을 띄고 각자 다른 기승전결같은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느꼈다
그리고 휴가에 관해서는 정기휴가만 TMO를 통해 KTX운임료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나때는 병장 월급이 14만원이던 때라... 후임들 냉동식품이랑 과자 챙겨주면서
포상휴가를 받아 창원<->안양(광명역)까지 왕복 KTX를 탈 때면 거의 10만원정도가 나갔었다...
난 전역때까지 거의 돈을 모으지 못했다.ㅠㅠ
집이 가까운것도 아니고, 2박3일이나 3박4일 포상휴가를 받을때면 근처에서 놀자니 놀것도 없고....후
결국 요즘 친구들은 군적금 천만원도 넘게 모아서 나온다는데...ㅎ 뭐 부러우면 지금 군대 가시던가요!?(나한테 하는말)
군대에서 가져온거아니고, 일병때 쯤 집에서 공부 + 혹시 모를 목적을 위해 구매한 것들
군대얘긴 이제 그만~!!
결국 2014년 7월에 잘..! 전역하고 돌아왔다
여기까지 읽어준 분들도 몇 없겠지만 감사합니다...@@@
근데 아직 많이 남았어효.....ㅎ
어학연수 - 6개월
2014년에 7월에 군대를 전역하고,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내가 군대 들어가기까지 모은 돈+군대에서 모은돈+부모님이 보태주신 돈)으로 해서 필리핀으로 6개월 어학연수를 다녀올 생각 없냐고 하셨다
나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일단 영어학원부터 알아봤다
근데!! 바로 당장 다음달 가야했었다.....!!
내가 알아본 바로는 스파르타, 세미-스파르타, 일반 학원 이렇게 3개로 나뉘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당시 셀크는 스파르타학원이었다
필자닷컴이란 곳을 통했었고, 세부에 있는 Celc 학원으로 갔다
기억나는 이 학원의 특징 몇가지를 말해보면
1. 학원이랑 기숙사랑 바로 연결되어있다.
2. 가장 중요한 EOP(English Only Policy) 정책
3. 매일 아침-저녁으로 있는 단어-문장 시험
4. 월-목요일 외출 금지. 금요일부터 나가서 일요일 밤에 들어와야 함
5. 1:1수업, 그룹수업이 존재한다. 그룹 수업때는 토론방식이며 특정 카드를 선택해서 내가 그 의견을 영어로 주장하고 defense해야한다
6. 2주에 한번 alteration 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때 영어선생님을 바꿀 수 있다. 또는 학원 내 1등을 하면 바꿀 수 있었다
7. 월말에 항상 영어시험을 쳤었다. IELTS 방식인걸로 기억한다
8. 2번을 어길 시 그 주 외출이 금지되며 I will not speak in korean이라는 손깜지를 총 3장정도 10p로 작성해야한다!!
2번은 뭐였냐면, 해당 학원 내에서는 영어만 사용했어야 했다
정말 과장없이 누가 뒤에서 밀어서 엄마얏! 이란 말을 내다가 학원 선생님한테 적발되면 그 주 주말은 못나갔다
대신 수업때는 정말 영어 극극극초보자를 위해서 한국어 사용을 어느정도는 허용해줬다
나는 필자닷컴이라는 곳을 통했기 때문에 카페에 일기글을 작성하는 대가로 장학금을 미리 받은것 같다(얼마인지는 기억이..)
영어 이름은 SAM!!! 으로 정했다. 먼가 쌤(선생님)같기도 하고, 쌤통이기도 하고 쌤쌤일수도있고 ㅋㅋ 부르기 편하자너~~
해외에 출국하기전에 필요한 서류나 영어공부, 그리고 단기알바를 했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1개월이 흘러 2014년 8월이 돼서 세부로 떠나게 됐다
무려 10년 전 내 글들...ㄷㄷ
열심히 공부한 내 흔적들
그 당시 어학연수를 온 친구들은 내가 느끼기엔 어느정도 집이 잘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용돈이 없지는 않았는데 월 20만원?정도였
던 걸로 기억한다
아무리 필리핀 물가가 싸다지만, 주말에 나가서 장을 봐오면 끝인 금액이다..
나는 6개월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보내면서 세부 바다로 뛰어든 적도, 이쁜 섬에 가본 적도 없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리핀 현지인들과 농구하고, 현지인 애기들과 뛰어다니고.. 하다가
세부&타갈로그어를 조금 공부해서 현지인이랑 잘 협상해서 한 7만원 정도에 그냥 굴러가기만 하는 자전거를 구매했었다
이 자전거로 혼자서 진짜 주말마다 방방곡곡 다녔었다
어느날은 너무 멀리 나갔다가 한밤중에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 근처는 무서운 골목이었다. 필리핀은 총기 소지가 가능한 나라였기때문에 소총을 목에 걸고 들고있는 무서운 아저씨들도 지나쳤다...
이 당시 나는 스마트폰이 아닌 연아햅틱폰을 쓰고 있었기때문에 구글맵 이런것도 못 쓰고.. 나 이렇게 해외에서 미아되서 다털리고 죽는거아냐!?라고 생각했을 때 쯤, 내가 다니는 학원 위치를 안다는 현지인을 만나서 구사일생으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경험도 있다..ㅎ
비자트립 - 말레이시아, 싱가폴(9일)
- 말레이시아
과거의 나야..... 좀 줄바꿈도 하고 단락 정리좀 해라;; 우........보기 힘드네!!!
요약을 하면 비자트립을 가게 된 목적은 비자연장 비용보다는 비자트립을 다녀오는게 더 수지타산이 맞았다 이런 내용이고..
말레이시아 여행을 요약하면 쿠알라룸푸르 구경하고, 숙소 예약 없이 특정 지역을 왔다가 겁나 힘들었고... 싱가폴로 넘어가기 전에 말레이시아 현지인 부부 집으로 가서 밥도 얻어먹고, 한국을 좋아한다며 사극을 틀어주시는 모습도 보고 새벽버스 정류장까지 또 태워주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라는 뜻
- 싱가폴
아..... 맞춤법 좀 맞추고, 줄바꿈좀 해라 이놈아 ㅡㅡ;
어쨌든 잘 다녀왔다는 내용이었다ㅋㅋㅋ 혼자 정말 잘~~~도 돌아다니고 놀았다
독일에서 싱가폴로 여행온 형이랑도 조금 돌아다니기도 하고, 숙소에서 만난 형제자매하고 친하게 놀기도 하고 그랬다
다시하라면 못할 20대의 추억이자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어학연수 끝(2015.01)
누구는 어학연수로 필리핀?놀러간거아님? 너 문란함..? 이렇게 생각하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국내/해외에서 클럽을 가본적도 없고, 필리핀에 있을때는 혼자서 잘 돌아다니고 놀았었다
조금은 부유한 남들과는 달리 나는 식비를 사면 끝이었기때문에 여행 한번 안가고 부모님께 자랑스런 아들이 되기 위해 진짜 죽어라 열심히 공부했다
복학(2-1)
이제 드디어 2015년 1월이다...(24살)
군대도 전역하고 어학연수도 다녀왔으니 이제 뭐할까? 복학해야지
2학년을 다니며 준비했던 건 편입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2015년에 2학년 1학기를 조용히 수료한 뒤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아! 그리고 내 친구들은 2010년부터 쓰던 스마트폰+카카오톡을 나는 2015년에 갤럭시6을 구매하며 처음 써보게 됐다!!크크
여름방학(비트컴퓨터학원)
여름방학 중 1달간 비트컴퓨터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알바하며 모아둔 돈을 또 여기에..)
C++로 수업을 받길 희망했지만 C++ 수강생이 적어서 폐강되고 Java반으로 수업을 듣게 되었다
7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약 1달간 수강을 하는 과정이었다
아침9시까지 학원에 가서 저녁6시까지 수업을 듣고 저녁6시부터 10시까지 강제적으로 공부/과제/프로젝트를 해야했다
jQuery, Servlet, JSP, jstl, javascript, java, oracle db, jdbc.. 등등
2024년 지금 개발을 시작하는 학생들이 보면 조상님...?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정도로 옛 기술들을 배웠는데, 놀랍게도 이 당시는 이게 나름 최신 개발 스펙이었던걸로 기억한다
이때 학교에서 배우는 C,C++,Java가 아니라 서블릿 컨테이너를 사용해서 api도 만들고, DB도 연동하고 JDBC/JDBC Template등을 사용해서 프로젝트를 한 경험은 짧았지만 지금까지도 값진 경험이다!!!
이때 약간 과거를 조금 후회했었다. 중학생 당시 큰 인내심을 갖고 C언어를 마스터하고, 선린고나 정보고 등으로 진학해서 개발커리어를 쭉 이어나가고.. 군대도 일찍 다녀오고, 어학연수는 다녀오지 않았다면 꽤 괜찮은 개발자가 되어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ㅎㅎ(근자감 아녀?)
알바몬 그 자체 + 독학편입
여름방학이 끝나고 2015년 말쯤, 원래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했다. 어차피 편입시험 보고 합격하면 기존 대학교를 자퇴해야된다. 아니면 2중 입학에 걸리기때문.. 근데 난 시험을 보지도 않았는데 미리 자퇴해버렸다
이렇게 해야 나는 대학생도 아니고 이제 일반인신분이라 생각해서 열심히 할것 같았기 때문이다
2016년에는 학사편입을 마음먹고 알바를 하며 생활비를 벌고, 혼자 공부를 했다
그리고 학사편입이었기때문에 학점은행제로 140학점을 채우면 요건이 됐었다
전적대에서 이수한 xx학점 + 자격증 + 학점은행제 수업을 통해 140학점을 채우고 학사편입을 할 수 있던걸로 기억한다
이과편입이라 수학/영어 둘 다 준비를 해야됐었던 상황이라 편입학원을 끊고 수업을 들어야 했지만... 집안 사정상 나에게 편입학원을 보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냥 나는 편입영어책, 편입수학책을 사서 독학을 했다
편입영어는 단어만 진짜 주구장창 외웠다
주중 5일은 아침10시부터 밤10시까지 가산역에 있는 죠스떡볶이에서 알바를 했다
주말 2일은 편의점 알바를 했는데, 공부할 시간이 매우 부족했었다
그리고 가난한 집을 조금 탓하기도 했다ㅠ 남들은 집에서 주는 돈으로 재수도 하고 편입학원도 다니는데 나는 기름냄새나는 옷 입고 퇴근하고 씻고 집와서 단어책 보고,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다만 수학은 공부하다가 너무 어려워서 모아둔 돈으로 인강을 끊었다
편미분, 중적분, 선형대수.... 잘 몰라도 꾸역꾸역 공부했다
2016년 말 총 10몇군데의 편입시험을 보러 갔다
고려대, 중앙대, 숭실대 ... etc
11~12월 눈내리는 겨울날. 나를 응원을 해주는 사람은 나 혼자가 유일했다!!!
26~30[반오십~30살](2017~2021)
- 2017
편입...성공했을까?
주7일 알바하면서 공부하고 가능..?
결국... 한국외대, 광운대, 경기대 총 3군데를 합격했다..
광운대 수학이 괴랄했었는데 찍신이 강림한건지..ㅋㅋ
나는 이 중 광운대를 선택했다
과는 소프트웨어를 선택했다(컴퓨터공학과는 하드웨어 커리큘럼에 가까웠다)
주 7일 알바하면서 독학편입으로 수학까지 보는 이과편입을 어떻게 통과해보려따 헤헿
학교를 합격함에 따라 1년 넘게 다니던 알바들을 그만두고 복학준비를 했다
근데 중요한건 이전 대학교에서 열심히 들었던 전공수업들이 무시되어서 전공학점을 3학점만 인정받게 되었다(나머지는 다 교양으로)
나는 졸업까지 필요한게 60학점이었는데, 2년 안에 전공만 57학점을 들어야 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남들은 4년동안 듣는 60학점을...ㅠㅠ
그래서 3-1학기는 7전공을 신청했다.....결과는 망...
난 편입으로 17년에 들어왔기때문에 3학년으로 시작하고 15학번 학생으로 처리됐다(원래대로라면 나는 원래 11학번 AZ..........)
내 인생의 또 한 챕터가 광운대에서 시작됐다
이제부터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아.. 똑같다. 또 알바몬 이야기이다
경기도 안양에서 서울 노원구 소재에 있는 학교에 1교시 수업을 오기란 참 힘들었다
대부분이 청량리행까지였으며, 아침시간대는 지옥철이었다
3학년 1학기때는 노트북이 없었다. 수업때 열심히 손으로 필기하고 집에가서 PC로 과제 제출을 했다
여름방학이 되고 알바를 더 열심히 다녔다
내가 했던 알바는 당구장, 피시방, 편의점, 중국집, 스키장 알바 등등.. 셀수없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모은 돈으로 그램을 구매했다
그리고 학생생활비를 대출받아서(보증금 보태기) 2학기에는 반지하방에서 인생 첫 자취를 시작했다
2학기 당시 몸을 혹사해서 그런가... 편도가 부어서 염증이 나고 목소리도 안나오고 물도 힘들게 마실정도가 되어 병원에 입원했다
전치 3주 처방을 받았다...
나는 이때 5전공 1교양을 들었었는데 전공3개가 같은 교수님이었다
나는 해당 교수님한테 내 입원 사실을 알리고 수업을 못들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혹시 입원서류를 드리면 출석으로 인정이 되지 않을까요?라고 여쭤봤었는데
1회만 출석을 인정해주신단다.. 아니;; 주2회 수업이 총 3주면 6회인데 여기서 1회만 출석인정이면 5번 다 결석으로 되는거아닙니까..?
학생들의 형평성을 위해 어쩔수없다고 하셨다
(나는 입원해서도 코딩했다고...! 이 열정을 몰라주는 교수님 미워....ㅠㅠ)
나는.. 그 당시 이게 잘못된건줄 모르고 편입생이라 아는 사람도 없고, 억울하지만 원래 대학교는 이런건가..?싶은 채로 지나갔다
결국 내가 아무리 시험을 잘 봐도 이미 출결때문에 전공3개씩이나 전부 F가 떴다..
이게 F가 좋은게 아니다. "재수강하면되잖아?"하는데 난 일단 총2년동안 전공 57점을 채워야됐고, 매학기 들을 수 있는 전공 과목도 한정되어 있고 수강 신청도 성공할지 미지수이고.. 등등 문제점이 많았다
아마 이때 내가 입원을 하지 않았더라면 졸업을 조금은 괜찮은 학점으로 하지 않았을까 가정해본다..ㅠ
한번도 술마시는 곳에 간 적도 없고, 놀지도 않고 나는 알바몬생활로 월세랑 생활비만 벌고 집에 오면 조금 쉬다가 공부하는게 전부였다
시험기간이 되면 항상 이 알바라는게 말썽이었다. 나중에는 평일 야간알바도 했었는데, 야간에 공부한다는게 여간 쉬운일이 아니었다
나는 과제는 대부분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시험이 어려웠었다
부모님한테 용돈 받으면서 동아리나 대외활동이나 외주같은 프로젝트도 하고, 시험기간때 암기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기도 하고 어떤 과목들은 선배들한테 족보까지 받을 수 있는 현역 대학생들이 부러웠었다..ㅠ
휴.. 뭐 어쨌든 정말 힘들었던 2017년이 지나갔다.. 학점은... 먼산..
방학때 C언어 유튜브나 강의를 찍어볼까 하고.. 영상을 몇개 찍었는데.. 이어지진 못했다ㅎㅎ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
- 2018
에...? 내가 왜 4학년..?
뭔가 이때 나도 모르게 번아웃이 조금은 왔던 기억이 있다
평일 주3일정도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낮에 학교수업이 끝나면 노원 자취방에서 금천구까지 와서 중고딩 영/수 과외를 했었다
4-1학기가 끝난 시점에 이러다가는 죽도밥도 안될거같아서 야간편의점 알바를 그만뒀던 것 같다
남들은 선택과 집중을 하라고 했다. "너가 지금 알바하는것보다 공모전 나가고 취업준비하는게 훨씬 이득이야"
알아요 아는데... 월세는 누가 내줍니까..ㅎㅎ
다들 각자만의 사정이 다 있는거라고 생각한다
4학년때는 과제봇이 되어서 과제만 주구장창 했다
아! 그리고 졸업작품도 완성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5YHU0o7SM
https://www.youtube.com/watch?v=CGiwO1u3e6M
https://www.youtube.com/watch?v=k8slgfZ9pp4
- 2019
나는 2017년 하반기에 일어난 사건때문에 5학년까지 다녀야했다
전공60학점을 채우지 못했기때문이다..ㅠ
그래서 5-1까지 다니고 가을에 졸업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느껴서 지원을 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했다(후회됨..)
- 2020
2020년 초에는 아는 형이 사장으로 있는 가산에 있는 회사에 주4일 출근하는 시급제로 일을 했었다
(시급 만원...)
내가 들었던 건 백엔드 업무라고 들었지만, 실상 가서 했던건 엑셀/vba, Discord 봇 만들기(python), 안드로이드 어플 만들기였다
4개월정도 일을 하다가 대표님이 정규직으로 일할 생각 없냐고 물어봤는데, 난 거절을 했다
나 혼자만 개발자이면서 내가 원하는 자바 스프링.. 백엔드랑 너무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시급도 만원이면 거의..)
이후에 집에서 이것저것 공부했던 것 같다(야 너 그냥 자바랑 스프링만 공부하라고...과거의 나ㅜㅜ)
하반기에는 졸업한 학교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스크래치 블럭코딩을 가르칠 대학생 강사를 모집한다길래
졸업생도 가능한지 문의드리고, 신청서를 넣어서 아이들 대상으로 선생님이 되는 경험을 했다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정도 진행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9o02UFOLM
코드로 하면 Thread.sleep(), while(true)-break, new Random(seed) 등등 사용해야 할 어려운 작업일텐데
이런식으로 코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배웠다
- 2021
2020년12월에 자바의 정석 저자이신 남궁성님이 국비지원 수업을 오픈하신다고 네이버카페에 공지글을 올리셨다. 나는 냉큼 신청했다!
종로 비트컴퓨터학원에서 맨 처음에 열렸었는데, 어떤 모종의 이유로 학원명이 에이아이아카데미로 최종 변경됐었다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아 듣는 국비수업인데, 아무나 들을 순 없고 몇몇 코딩 문제를 손코딩으로 풀어야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무난하게 패쓰~!
총 6개월 진행을 했고 1월부터 6월까지였다. 4개월 수업, 2개월 프로젝트 기간이 주어졌다
Java, Spring, Spring boot, Mybatis, JSP, javascript, jQuery.. DI/AOP 등에 대해 배웠다
여러 미션들이 주어졌는데, 얼렁얼렁 해치우고 나는 뒤에서 조금은 다른걸 공부했었다ㅎㅎ
맨 뒷자리라서 가능했었다
프로젝트를 했을 당시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총 6명에서 1명이 중도하차를 하고(리덕스에서 극복 못함...)
프론트3+백엔드2명으로 개발을 진행했다
우리는 채용공고를 올려주는 기업/개인간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프론트는 React.js, 백엔드는 Java,Springboot,JPA+QueryDSL,jMeter를 사용했다
우리팀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JSP를 사용해서 웹 개발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병목이 되지 않도록 정말 열심히 했다. 이때 같이 IntelliJ의 Code With Me등을 활용해 쿼리튜닝도 하고, 많은 논의를 했던 백엔드 친구는 지금 K사에 코어 백엔드 개발자로 근무하고 있다! 나머지 팀원들도 서비스 회사에서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열심히 근무중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jakSh3D3j5A
프로젝트 발표영상..1부는 내가, 2부는 프론트엔드 다른 사람이 발표했다
31~33[~현재](2022~2024)
2022~2023
2021년 12월부터 2022년 1월까지 엄청나게 많은 면접을 보러 다녔었다
12월 달력 사진은 없지만, 1월 못지않게 여러 회사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 2022년 1월 첫 취업을 하게 되었다
2022년, 2023년 초에 적었던 아래의 회고 글이 있긴한데 짧게 텍스트로 또 적어본다
https://code-boki.tistory.com/88
https://code-boki.tistory.com/101
첫번째 직장(정규직)은 강남에 있는 행사 도메인 회사였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스프링 백엔드 개발자로 일을 할 수 있게 됐었다
하지만 시니어 개발자는 2년차 개발자 2명이었으며, 내가 입사하고 1명은 나갔고 내 입사 동기는 나 포함해서 총 3명이었다
그 중 나 혼자만 전공자였고, 나머지는 지질학과 역사전공학자, 요리학과 등 다양했다ㅠㅠ
인프라는 대기업 못지않은 곳이었다(회사가 부자!). CI/CD는 GitlabCI와 ArgoCd와 k8s(쿠버네티스)를 같이 써서 자동화를 시켰고, Private Respository - Nexus 등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소스코드는 2010년대 초반을 보는 듯 했다ㅠ
테스트코드는 당연하게 없었으며, 앞서 작성된 사람이 왜 이렇게 작성했는지에 대한 고민도 없이 Ctrl + C/V를 쓰고 확장성과 중복코드에 대한 고민이 없는 동료들과 선배개발자를 봤다. 과연 유지보수가 될 수 있을까..?
부족한 시간과 인력은 외주로 맡겼으며, 의미 없는 야근이 잦았다
한달에 7일정도만 정시퇴근을 한 것 같았고, 새벽 2~3시에 택시타고 가는 일이 정말 많았다
내 건강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일을 계속 하다가 퇴사를 결심했다
두번째 직장은 성수에 위치한 세무 관련 도메인 회사였다
Angular2(Typescript), Spring boot(Java), MongoDB를 쓰면서 풀스택 개발자로 일을 했었다
시니어 개발자도 DRY와 KISS를 알고 적용하려고 노력하며, 정말 개발자로서 배울 점이 많았었다
세무에 관한 도메인 회사였기 때문에 DB 스키마와 Angular 컴포넌트명을 노트에 적어서 달달 외웠다
처음으로 도메인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전문용어 등)
또한 내가 처음 써보는 NoSQL과 TypeScript, Angular에 대해서도 많이 부족함을 느꼈기 때문에 SCSS, Angular 강의를 결제해서 수강했었고, MongoDB Day 2022 Seoul 행사 등에도 참여해서 인사이트를 얻곤 했었다
백엔드부터 화면까지 전부 다 내 일 이었다. Angular는 Spring을 닮아있어서(DI) 개발하기 편했지만, Component Lifecycle에 대한 어려움이라던지 MAT-UI 라이브러리의 정해진 규칙, CSS의 Cascading 속성 등 어려운 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퇴근하고 공부하고, 주말에도 공부를 계속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직장 내에서 어떤 부당한 언사를 듣기도 했고, 사람때문에 너무 힘들었었다
어느날 정말 심한 말을 듣게 됐고, 이건 아니다 싶어 신고를 하려다가.. 이직을 결심했다
2023년 초부터 다닌 회사는 같은 성수에 있는 헬스케어 도메인 회사였다
맨 처음에는 입사할 당시에는 Vue를 쓰는 프론트엔드 개발자로 들어갔다
첫번째로 지원사격을 했던 프로젝트에서는 Vue만 썼었다
같은 Ts였지만 Angular와는 다르게 반응형(ref)으로 변수를 감싸기도 하는 모습이 신기했지만 vue2/vue3 그리고 options/composition api 스타일 등의 차이점이 구글링을 하는데 어려움을 줬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도 회사에서는 Vue3 + composition api + script setup lang="ts"를 사용해서 표준/최신을 따르려고 노력했었다
첫번째 프로젝트 지원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될 쯤
두번째로 File처리(protobuf)를 해야하는 프로젝트가 주어졌는데, 그 당시 나는 스프링을 할 줄 알아서 스프링으로 파일처리를 하는 서버를 만들다가 회사가 Java를 꺼려한다는 걸 깨닫고 Kotlin을 공부해서 Kotlin Springboot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ㅋㅋ 같은 JVM언어인데)
인증은 Security를 사용하는 것 대신 유연하게 사용하고 싶다고 해서 그 당시 회사의 다음 decision이었던 Supabase의 인증모듈인 gotrue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프론트도 역시나 함께 진행을 했었다. 맨 처음으로 의사/간호사가 보게될 생체신호 그래프를 동적(ws), 정적(file read)으로 그려주는 프로젝트를 내가 직접 맡아서 진행하니까 신기했다
이 두번째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백엔드 개발자가 되었다ㅋㅋ(?)
정말로 포지션을 Frontend Engineer에서 Platform Engineer로 변경했다
세번째 프로젝트부터는 정말로 백엔드쪽을 맡아서 카프카/카프카 스트림즈를 통해 실시간으로 어떤 처리를 하는 프로젝트를 도맡았다
거의 모든 프로젝트에서는 도커/쿠버네티스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입사초기부터 야금야금 조금씩 공부해 나아갔다
항상 나에겐 공부거리를 주어주는 고마운 회사였다
(나중에는 이게 기술부채로 돌아오게 되는데...)
틈틈히 Kotlin, Go, Dart(Flutter) 등도 공부를 이어나갔다
https://code-boki.tistory.com/147
https://www.youtube.com/watch?v=HCIsRA5NhRQ
어찌저찌 이 회사에서 1년 4개월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2024년이 됐다(계속)
- 2024
2024년은 올해이며, 나에게 여러 시련을 안겨준 한 해이다
일단 2024년 3월 8일에 우리 가족에게 특히 나에게 행복을 안겨준 사랑스런 강아지, 몽이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2023년 1월경 폐암진단을 받은 아버지도 집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때에 내 동생도 위암으로 시작해 전이가 돼서 새벽마다 울고.. 우리 가족 모두 다 출근해야되는데 2~3교대로 쪽잠을 자며 그렇게 2달을 보냈다
내 동생도 2006년에 우리집에 와서 18살이나 먹었기 때문에 이미 노쇠할대로 노쇠한 노견이었다
암이 걸리기 훨씬 전부터 걷지 못했고, 밥도 혼자서 먹지 못했었다
너무 아파하는 강아지를 보며 마약성 진통제와 치료제 등으로 노력했지만... 병원에서의 소견은 사실상 연명치료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해서 우리 가족은 결단을 내리게 됐다
2024년 3월 8일 동물병원에서 몽이를 보내주기 바로 전, 정말 놀랍게도 몽이는 고개를 들어서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18년동안 함께해서 고맙다고 말하는 눈빛처럼 보였다..................................
그렇게 강아지 동생을 하늘나라로 보내고 다음날 화장 업체를 통해 화장을 해줬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내 옆에 있을 것만 같고 앨범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그리고 몽이를 보내고 몇달이 지나고 아버지의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폐부터 시작된 암은 몸 여러군데로 퍼져서 밥을 드시는것도 어려워하고 씻기도 어려워하셨다
아버지가 항암치료를 받으러 갈때마다 내가 옆에 있어주고 돌봐드려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건강도 이미 나빠진 상태였다. 안좋은 식습관으로 인해 96kg정도 나갔으며 혈압/콜레스테롤 관련 약을 몇개월정도 먹고 있었다
나도 다이어트와 식습관 개선을 통해 건강을 회복할 필요가 있었고, 가장인 아들로써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도 신경쓰고 책임져야 했었다
2024년 6월.. 당시 진행중이던 프로젝트가 어느정도 마무리 된 시점, 심사숙고를 한 끝에 퇴사를 말씀드렸다
정신적/신체적으로 지쳐있었고, 아버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니 수긍을 하셨고 내가 나가기 전에 대체할 인력을 채용하기 위해 면접에도 여러번 참여했다
- 퇴사 후
현재는 퇴사 후 집에서 아버지 밥을 차려드리고, 씻겨드리고 집안일을 끝마치고 난 다음에 공부하러 집 근처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다
처음 아버지를 씻겨드리던 그 순간.. 가슴이 좀 이상했다
20~40대까지 식스팩도 있을정도로 몸이 좋으셨었고, 항상 건강할줄만 알았던 아빠가 근육이 하나도 없는 채로 씻을 힘도 없어서 욕조에 앉아있는 모습은..
그리고 퇴사 후에 내가 알았던 것들을 더 잘 알기 위해서 정말 다양한 강의를 보고, 스터디도 진행하고 개발행사도 다녔다
아마 2024년 6월 이후의 블로그 내용을 보면 보일 것이다..ㅎㅎ
재직중일 당시 동기인 개발자가 나한테 물어봤다. "xx님은 왜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그 질문을 듣고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더 안좋은 상황에 있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가난한 형편이었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내가 좋아하는 개발을 꾸준히 하는 수밖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개발은 재밌고 즐겁다. 맛있는 케익을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잘라먹을지, 뒷 정리는 어떻게 할지.. 이런 생각들이 재밌다
그리고 2024년 9월 말 현재, 다시 구직중에 있다 (연락주세요...!!)
만족할만한 회사를 합격하고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장남이 되고싶다
글또를 지원하기 위해 쓴 내 인생 일대기였는데, TMI가 너무 많은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길게 쓰는게 맞나 싶기도 하다
그래도 글또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어딘가에 내 발자취를 기록하고 싶었다
2024년 이 글을 본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끝맺어본다❤️
'DailyLife > 글또(개발자 글쓰기 모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들면서 배우는 클린 아키텍처 X 도메인 주도 개발 시작하기> 책 리뷰 (9) | 2024.10.27 |
---|---|
Spring boot 3.x.x(Spring 6.x.x)의 API 호출방법 with openFeign (9) | 2024.10.13 |
글또 10기(마지막 기수) 합격 (3) | 2024.09.27 |
댓글